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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먼 곳> (2020) - 감독 박근영 / 글. 김진실

작성자 등록일 조회수
전주영화제작소 2021-03-23 925
[ 관객동아리 ‘씨네몽’ 회원 개봉작 리뷰 ]
 <정말 먼 곳> (2020) / 박근영


낯선, 그래서 가까운 <정말 먼 곳>




얻는 것이 잃는 것보다 더 힘든 시기가 있다. 그러나 주인공 진우에겐 사치일 뿐이다.
그는 가진 것이 없음에도 잃어야 했다. 심지어 잃는 일이 너무 쉬워, 더는 잃어버릴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직 잃지 않은 '이것'만큼은 지키고 싶어 필사적으로 도망친 인물이다. 영화 제목 그대로 '정말 먼 곳'으로 도망갔다. 자신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잊히기 위해 깊은 시골, 사람이 가장 없는 화천으로 숨어들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은 욕망보단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더 꼭꼭 숨기기 위한 최선이었다. 

그에게 남은 건 딸, 설이다. 그가 무엇을 얻었고 잃었는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설이가 그가 잃지 말아야 할 유일한, 마지막 존재임은 분명하다. 설이는 매일 아빠를 엄마로 부르면서 목장 곳곳을 뛰어다닌다. 아이는 목장 주인(종만)의 손녀로 자리 잡고, 할머니의 간병인을 자처한 종만의 딸 문경의 살뜰한 보살핌 아래 크는 중이다. 매일 함께 밥을 먹으며 그들의 가족이 된 진우와 설. 특히 진우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 생각이 없기에, 어렵게 찾은 안식처에서 열심히 일한다. 마음이 힘들 땐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과거에서 잃은 것들을 고된 일과 딸의 웃음으로 잊어버리는 진우의 모습은 멀리서 보기에도 꽤 편안해 보였다. 
그의 앞에 오래된 연인, 현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진우의 고민은 현민으로부터 시작된다. 대학교 친한 후배란 이름으로 찾아온 현민은 젊은 시인이자, 진우의 연인이다. 진우와 같이 살 생각으로 성당에서 시를 가르치는 강사로 일하기 시작하는 현민. 시민들에게 시를 쓰는 법을 강의하면서 그가 가장 먼저 한 말은 "목적어와 서술어의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였다. '핸드폰을 깨부수다'를 '가을을 깨부수다'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걸 강조하며, 사람들이 가진 고정관념만 깬다면 자신만의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 왜 진우가 사람이 가장 없는 시골로 왔는지,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영화 <정말 먼 곳>은 생과 사 중, 유독 죽음에 집중한 작품이다. 들판에 쓰러져 숨을 헐떡거리는 양을 땅 깊숙이 파묻는 첫 장면이 인상적인 이유는 죽음이 엄청난 '이슈'가 아니라 '당연한 자연의 섭리'임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죽은 양을 바라보는 딸과 진우의 모습에선 최소한의 슬픔만이 느껴진다. 슬픔과 두려움에 할당량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린 모두 암묵적인 선을 알고 있지 않은가. 때론 그 점이 사람을 망가트리기도 하지만,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자에겐 건강한 분출방식이 되기도 한다.

사실 진우에게 죽음은 익숙하다. 사람들의 외면과 질타, 도를 넘은 비난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죽여야 했다. 나아가 미술을 전공해 꿈을 꾸던 미래는 물론 당시 현재까지 버려야만 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매정한 현실에도 의연해 할 줄 아는 현민과 달리 진우는 보이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굳이 문제가 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 

진우는 죽음을 남들보다 더 가깝게 느꼈지만, 단 한 번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결과, 진우는 자신을 엄마로 부르는 딸에게 숲 밖의 삶을 금지한다. 일상적인 교육과 평범함이 주는 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상처를 받았던 자신을 생각하며 설이의 당연한 기회를 박탈한다. 그것이 설이에게 보이지 않은 끝, 죽음과도 같다는 것을 정말 그가 몰랐을까. 딸을 위해 사는 것처럼 보였던 진우는, 자신이 언제든 숨을 수 있는 동굴을 파는 중이었다. 그는 진심을 표현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방식이 더 편한 사람이었다. 

갑작스러운 설이의 친엄마 등장과 목장 주인의 어머니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가 선명해질수록 진우는 자신의 안식처가 붕괴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설이가 없는 세상에 살 자신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우물 안 개구리로 딸을 키울 수는 없었으니까. 동시에 현민과의 관계는 또다시 사람들의 수많은 시선으로 틀어진다. 주목할 점은, 위태로운 진우의 상황이 계속 흘러가는데, 그를 힘들게 하는 인물들이 기묘하게도 다 같이 상에 둘러앉아 자주 밥을 먹는 점이다. '꼴 보기 싫지만 그래도 가족이니까!'라고 생각해도 살짝 낯설지 않은가. 

<정말 먼 곳>은 낯선 작품이다. 대부분의 퀴어영화가 가진 갈등 요소(사람들의 시선)와 이 요소를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선택으로(고꾸라지는 인물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인물의 충돌) 다른 결말을 내는 방식도 익숙한데, 자세히 뜯어보면 그런 영화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정말 먼 곳>이 보여주는 끝엔 언제나 서로 어울리지 않는 양극단의 감정이 함께 존재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과 새롭게 맺어진 가족들의 안정이 꾸준히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으면서, 침묵만을 유지했던 진우를 깊게 공감하게 한다. 단순히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영화가 아닌 현실 속의 인물로 살아 숨 쉬게 한다. "영화니까."란 전제를 완전히 부수는 것이다. 게이의 신분이 아닌 설이의 아빠로, 현민을 사랑하는 연인으로, 목장 주인을 존경하는 인부로, 수많은 나인 '진우'란 한 인간이 현실을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주는 거다. 한 인간으로서 나와 다른 타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묻는 말이 어쩜 이렇게 낯설면서 친절할 수 있을까. 

작품이 죽음에 집중한 이유 역시 낯설게 하기의 일환이었다. 죽음은 곧 끝이 아니다. 
진우에게 죽음은 분명한 결승선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출발선이기도 하다. 
이는 죽음이 자연의 흔한 반복적 행위임을 깊이 공감할수록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물론 허울뿐인 희망일 수도, 놓을 수 없는 욕심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가 다시 선택했다는 거다. 우리 역시 <정말 먼 곳>을 통해 잃는 일과 얻는 일의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을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애써 담담한 척하는 진우를 위로한 종만의 한마디를 듣는 순간 알 것이다.
그 말이 곧 <정말 먼 곳>이 우리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다 알 순 없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정말 먼 곳>은 낯설기에 빛날 수밖에 없는 작품이며, 그렇기에 우리와 가까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 관객동아리 씨네몽, 김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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